요즘 드라마 뭐 볼지 고민하다가 결국 예전 것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도 그렇게 다시 만났습니다. 처음엔 계약 결혼 설정이라 가볍게 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보다 보니 여기저기서 뻐근하게 찔리더라고요. 서른이라는 나이, 보증금 한 푼 없는 현실, 하고 싶은 일과 먹고사는 일 사이에서 흔들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이거 나 얘기 아닌가" 싶었습니다.

계약결혼이라는 장치, 생각보다 현실적입니다
계약 결혼이라는 설정을 들으면 보통 '자극적인 전개를 위한 장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봤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맨스 드라마에서 계약 관계는 갈등을 빠르게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조금 달랐습니다.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이 결혼을 택하는 이유가 단순하지 않습니다. 집이 필요한 쪽과 월세 수익이 필요한 쪽, 서로 조건이 맞아서 계약서를 쓰는 장면은 솔직히 웃기면서도 씁쓸했습니다. 보증금조차 없어서 방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 프리랜서 신분에 신용등급 5등급이라 대출도 안 되는 현실. 제가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그 장면들이 유독 더 와닿았습니다.
드라마 경제학적으로 보면 이 설정은 단순한 멜로 장치가 아니라 비혼율(非婚率) 상승이라는 사회 현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입니다. 비혼율이란 결혼을 선택하지 않거나 미루는 인구 비율을 뜻하는데,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초혼 연령은 남성 33.9세, 여성 31.5세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드라마가 2017년 작품임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꽤 앞서간 문제의식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건 계약이라는 형식이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솔직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사랑이라는 명목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과 불편한 것을 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제 경험상 오히려 '우리는 사귀는 사이니까'라는 전제가 붙으면 말하기 더 어려워지는 것들이 있거든요.
- 집이 필요한 세입자 윤지호 vs. 월세 수익이 필요한 집주인 남세희: 조건이 먼저, 감정은 나중
- 계약서에 명시된 규칙들 — 명절 각자, 부부 연출 최소화 등 — 이 관계를 오히려 더 투명하게 만듦
- 계약 종료 이후의 피해를 먼저 걱정하는 남세희의 태도: 사랑이 아닌 책임감에서 시작되는 배려
드라마 추천 이유, 로맨스만 보면 절반만 보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로맨스 드라마라고 하면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고 장애물을 넘는 구조를 떠올립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도 결국 그 구조를 따라가기는 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드라마가 오래 기억에 남은 건 로맨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 윤지호는 드라마 작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프리랜서 보조 작가로 월 80만 원을 받는 처지입니다. 글을 쓰는 일을 계속할지, 안정적인 삶을 택할지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꽤 오랫동안 따라왔습니다. 저도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겠다고 버티던 시절에 비슷한 말을 들었거든요. "그게 밥이 되냐"는 말. 드라마 속 아버지가 하는 말이 제 귀에 꽂혔습니다.
플롯 아크(Plot Arc)라는 서사 구조 용어가 있습니다. 이는 인물이 이야기 전반에 걸쳐 겪는 내적 변화의 흐름을 뜻하는데, 윤지호의 플롯 아크는 단순히 '사랑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일을 그만두게 된 계기, 다시 글을 쓰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들이 꽤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앙상블 캐스팅(Ensemble Casting), 즉 주연 외의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서사를 갖는 구성도 이 드라마의 강점입니다. 수지와 호랑,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연애하고 결혼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주인공과 대비되면서, 보는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인물을 찾게 됩니다. 저는 솔직히 수지 이야기에서 더 많이 웃었습니다.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 드래곤은 이 작품을 통해 tvN 특유의 현실 밀착형 로맨스 노선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분석에 따르면 이 시기 한국 드라마 수출의 핵심은 판타지 로맨스보다 현실 기반의 감정 공감이었는데,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그 흐름의 앞단에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주는 위로, 뻔하지 않아서 더 오래 남습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니까." 이 대사가 드라마 내내 반복되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제목 설명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 말의 무게가 달라졌습니다. 서른이 되어도, 결혼을 해도, 사랑을 시작해도, 누구나 처음이라는 것. 그게 변명이 아니라 위로가 된다는 것.
드라마 속 남세희가 고양이 이야기를 하면서 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신피질(Neocortex)이 없는 고양이는 시간 개념이 없어서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도 우울하지 않다고요. 신피질이란 포유류 뇌에서 사고, 언어, 시간 인식을 담당하는 영역을 뜻합니다. 그리고 인간만이 나이라는 약점을 공략해서 감정을 소비하게 만든다는 말. 제가 서른 언저리에 이 드라마를 봤다면 아마 그 장면에서 멈췄을 것 같습니다.
감정 서사(Emotional Narrative)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논리적 전개보다 감정의 흐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감정 서사 구조를 씁니다. 사건보다 감정이 먼저이고, 대사 한 줄이 플롯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속도가 빠르지 않은데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위로는 오래 갑니다. "괜찮아"라고 직접 말해주는 드라마보다, 그냥 똑같이 힘든 사람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더 위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윤지호가 고시원에서 혼자 울면서 "도대체 얼마를 더 가야 되는 건데"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그냥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게 다였는데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번 생은 처음이라, 몇 부작이고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총 16부작이며, 2017년 tvN에서 방영했습니다. 현재 넷플릭스와 웨이브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 tvN 드라마들은 다양한 플랫폼에서 확인 가능한 편인데, 제 경험상 넷플릭스 화질이 가장 쾌적했습니다.
Q. 계약 결혼 설정이 불편하지 않나요? 막장스럽지 않나요?
A. 막장 전개를 기대한다면 오히려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계약 결혼이라는 설정을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드라마가 많지만, 이 작품은 그 설정을 현실적인 주거 문제와 비혼 선택의 맥락으로 풀어냅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불편함보다는 공감이 훨씬 컸습니다.
Q. 로맨스 외에 다른 볼거리가 있나요? 멜로를 잘 못 보는 편인데요.
A. 멜로가 주축이긴 하지만, 드라마 작가의 직업 현실, 서울의 주거 문제, 부모와의 관계 같은 소재들이 꽤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일반적으로 멜로를 선호하지 않는 분들도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충분히 재미를 찾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보니 그 말이 맞았습니다.
Q.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뭔가요?
A.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이번 생은 어차피 모두 처음이니까"라는 대사가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에게 건네는 말인데, 뻔하게 들릴 수 있지만 맥락 안에서 들으면 무게가 다릅니다. 전문 용어로는 캐릭터 모티프(Character Motif), 즉 인물의 핵심 주제를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2017년 드라마인데 지금 봐도 공감이 되나요?
A. 오히려 지금 더 공감될 수도 있습니다. 청년 주거 문제, 비혼 선택, 하고 싶은 일과 안정 사이의 갈등은 2017년보다 2024년에 더 보편화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시간이 지나도 안 낡는 드라마는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였습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요즘 기준으로 화려하거나 빠른 드라마는 아닙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면 이상하게 좀 가벼워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뭔가를 해결해줘서가 아니라, 나만 이렇게 허우적대는 게 아니구나 싶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즘 삶이 좀 답답하거나, 서른 전후의 감각을 다시 꺼내보고 싶은 분께 권합니다. 처음 보는 분이든 다시 보는 분이든, 아마 다른 장면에서 멈추게 될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9qt9bK9y5aw
https://kostat.go.kr
https://www.kofice.or.kr